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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83 海南 安湖里 · 石湖里遺蹟(해남 안호리 · 석호리유적)

발행일 2019-06-15
내용

 해남 안호리 · 석호리유적은 화산-평호 도로건설공사 과정에서 확인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성과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한으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유구들이 발굴조사 되었으나, 대부분의 유구는 삼국시대에 치중됨으로써 유적 일대의 지정학적 위치가 인문학적으로 최고의 선택을 받은 시기는 삼국시대였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해남반도 일원이 마한 시기의 종말을 맞이하고 백제시대로 진입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발굴조사의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마한 시기에 유적 일대는 대규모 묘역이 조성된 공간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도로가 건설될 노선이 산 능선을 따라 계획된 관계로 묘역 중심부는 도로 구간 아래쪽에 분포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조사구간에서 확인된 분묘 가운데 일정 규모의 분구를 갖춘 예는 57기에 이르렀다. 해남반도에서 이제까지 이렇듯 많은 수의 고분 흔적이 확인된 예는 없다.

 셋째, 고분은 상당수가 중심 매장시설과 추가된 묘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서, 당시의 해남반도 일원의 매장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고분 축조 당시의 주인공인 중심묘는 대부분이 목관 계열의 토광묘로 확인된 반면, 대형 옹관을 합구하여 횡치한 옹관묘는 추가된 배장묘에 한정된 경향성이 드러났다. 물론 시기가 늦어지면서는 점차 중심묘로 옹관이 안치되는 현상이 관찰되어, 영산강유역 마한 세력의 묘제가 옹관고분으로 대체되어 가는 일반성과 일치함도 확인되어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넷째, 두 유적에 조성된 고분은 기원후 3세기 후반으로부터 4세기 중엽 전후로 한정됨으로써, 고분 조성의 마감이 역사적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예시할 수 있었다. 즉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 기사와 침미다례 도륙 기사 내용을 참고하면, 그 즈음에 고분군의 마감이 확인된다는 점과 연계 검토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다섯째, 옹관 자료 복원과 정리과정에서 해남반도에서 발굴조사된 예들은 여타 지역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보고서 유물고찰에서 '해남식' 옹관으로 명명한 내용이다. 기원후 4세기대에 제작된 옹관의 형식이 경부가 없이 'U'자 형으로 성형되고, 합구시켜 매장한 옹관 한 개체는 소성 전에  밑을 투공시켜 제작한 특징이 확인되었다. 대옹을 관으로 사용할 것을 미리 염두해 제작하면서도 합구시킬 대옹의 하나에는 구멍을 뚫어 소성하였다는 점은 해남반도에 거주하던 마한 사람들의 매장풍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연구 성과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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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등록일 : 2019-08-22조회수 :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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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83 海南 安湖里 · 石湖里遺蹟(해남 안호리 · 석호리유적)

발행일 2019-06-15
내용

 해남 안호리 · 석호리유적은 화산-평호 도로건설공사 과정에서 확인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성과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한으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유구들이 발굴조사 되었으나, 대부분의 유구는 삼국시대에 치중됨으로써 유적 일대의 지정학적 위치가 인문학적으로 최고의 선택을 받은 시기는 삼국시대였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해남반도 일원이 마한 시기의 종말을 맞이하고 백제시대로 진입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발굴조사의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마한 시기에 유적 일대는 대규모 묘역이 조성된 공간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도로가 건설될 노선이 산 능선을 따라 계획된 관계로 묘역 중심부는 도로 구간 아래쪽에 분포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조사구간에서 확인된 분묘 가운데 일정 규모의 분구를 갖춘 예는 57기에 이르렀다. 해남반도에서 이제까지 이렇듯 많은 수의 고분 흔적이 확인된 예는 없다.

 셋째, 고분은 상당수가 중심 매장시설과 추가된 묘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서, 당시의 해남반도 일원의 매장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고분 축조 당시의 주인공인 중심묘는 대부분이 목관 계열의 토광묘로 확인된 반면, 대형 옹관을 합구하여 횡치한 옹관묘는 추가된 배장묘에 한정된 경향성이 드러났다. 물론 시기가 늦어지면서는 점차 중심묘로 옹관이 안치되는 현상이 관찰되어, 영산강유역 마한 세력의 묘제가 옹관고분으로 대체되어 가는 일반성과 일치함도 확인되어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넷째, 두 유적에 조성된 고분은 기원후 3세기 후반으로부터 4세기 중엽 전후로 한정됨으로써, 고분 조성의 마감이 역사적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예시할 수 있었다. 즉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 기사와 침미다례 도륙 기사 내용을 참고하면, 그 즈음에 고분군의 마감이 확인된다는 점과 연계 검토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다섯째, 옹관 자료 복원과 정리과정에서 해남반도에서 발굴조사된 예들은 여타 지역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보고서 유물고찰에서 '해남식' 옹관으로 명명한 내용이다. 기원후 4세기대에 제작된 옹관의 형식이 경부가 없이 'U'자 형으로 성형되고, 합구시켜 매장한 옹관 한 개체는 소성 전에  밑을 투공시켜 제작한 특징이 확인되었다. 대옹을 관으로 사용할 것을 미리 염두해 제작하면서도 합구시킬 대옹의 하나에는 구멍을 뚫어 소성하였다는 점은 해남반도에 거주하던 마한 사람들의 매장풍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연구 성과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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