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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2 麗水 月山里 虎山遺蹟(여수 월산리 호산유적)

발행일 2012-10-22
내용

여수 월산리 호산·월림유적은 율촌 제 1산단 남측지원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조사된 유적이다. 유적에 대한 조사결과 호산유적에서는 삼국시대 주거지 45기, 수혈 28기, 구 25기, 지상건물지 1기, 주공군 2기, 토광묘 3기, 석곽묘 1기, 석실묘 1기, 제철유구1기 및 조선시대 건물지 2기, 삼가마 18기 등 127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월림유적에서는 주거지 1기, 지상건물지 1기, 구 2기, 우물 1기 등 5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유적이 위치한 여수 월산리 일대는 기존 조사와 연구성과를 통해서 볼 때, 거점지역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여수반도에서 순천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해당하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인접하여, 해상교통이 용이하다. 또한 배후에는 비교적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자연환경적인 측면에서 생활하기에 용이한 지역이다. 특히 월산천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었는데, 월산천 주변 지역이 월산리 일대 유적군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월산리 호산유적 취락은 위치상 유적군의 외곽에 형성된 주변 취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월산리 호산유적에 대한 시간적으로 성격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가장 선행하는 취락의 점유기간은 출토유물이나 주거지의 구조적인 변화양상, AMS분석자료 등을 통해서 볼 때, 4세기 중엽에서부터 5세기 전엽까지로 1세기 미만이다. 이는 월산리 유적군이 가장 확장되는 시점에 월산리 호산유적까지 취락군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취락이 이동된 이후 이곳은 분묘군으로 역할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후기(17~19세기)에 삼가마 등의 생산시설이 설치되면서 생산공간으로 변화되는 양상이다.

월신리 호산·월림유적의 식생과 관련된 논과 밭 등의 생산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전문적인 기물 생산과 관련된 시설과 장비 등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호산유적의 39호 주거지에서 벼과 초본류가 검출되었으며, 23호 주거지에서는 다량의 팥이 출토되었다(약 600여점). 이렇게 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확인된 양상을 통하여 호산유적의 취락집단은 주로 농작물을 경작하였던 집단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식물규산체분석을 통하여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월림유적의 구에서도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벼농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게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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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등록일 : 2018-07-16조회수 : 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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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2 麗水 月山里 虎山遺蹟(여수 월산리 호산유적)

발행일 2012-10-22
내용

여수 월산리 호산·월림유적은 율촌 제 1산단 남측지원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조사된 유적이다. 유적에 대한 조사결과 호산유적에서는 삼국시대 주거지 45기, 수혈 28기, 구 25기, 지상건물지 1기, 주공군 2기, 토광묘 3기, 석곽묘 1기, 석실묘 1기, 제철유구1기 및 조선시대 건물지 2기, 삼가마 18기 등 127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월림유적에서는 주거지 1기, 지상건물지 1기, 구 2기, 우물 1기 등 5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유적이 위치한 여수 월산리 일대는 기존 조사와 연구성과를 통해서 볼 때, 거점지역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여수반도에서 순천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해당하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인접하여, 해상교통이 용이하다. 또한 배후에는 비교적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자연환경적인 측면에서 생활하기에 용이한 지역이다. 특히 월산천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었는데, 월산천 주변 지역이 월산리 일대 유적군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월산리 호산유적 취락은 위치상 유적군의 외곽에 형성된 주변 취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월산리 호산유적에 대한 시간적으로 성격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가장 선행하는 취락의 점유기간은 출토유물이나 주거지의 구조적인 변화양상, AMS분석자료 등을 통해서 볼 때, 4세기 중엽에서부터 5세기 전엽까지로 1세기 미만이다. 이는 월산리 유적군이 가장 확장되는 시점에 월산리 호산유적까지 취락군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취락이 이동된 이후 이곳은 분묘군으로 역할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후기(17~19세기)에 삼가마 등의 생산시설이 설치되면서 생산공간으로 변화되는 양상이다.

월신리 호산·월림유적의 식생과 관련된 논과 밭 등의 생산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전문적인 기물 생산과 관련된 시설과 장비 등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호산유적의 39호 주거지에서 벼과 초본류가 검출되었으며, 23호 주거지에서는 다량의 팥이 출토되었다(약 600여점). 이렇게 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확인된 양상을 통하여 호산유적의 취락집단은 주로 농작물을 경작하였던 집단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식물규산체분석을 통하여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월림유적의 구에서도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벼농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게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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